디자인업계의 현황을 파악하기 위한 리서치 방법 중 하나로 시각물 제작 업계 종사자 또는 이미 시도한 경험이 있는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인터뷰를 기획했다. 생태친화적인 디자인에 관한 다양한 입장을 파악하고 현장에서의 고민을 한 발짝 더 깊게 들여다보고자 기획자, 제작자, 재료 유통업자, 디자이너로 구성하여 총 6명의 관련업계 종사자들과 2024년 7~8월까지 인터뷰를 진행했다.
<어라우드랩> 공동대표 김보은∙김소은
인터뷰어 _ 신영은, 이화경
‘어라우드랩(Aloud Lab)’은 환경과 사회적 가치를 중시하는 그린 디자인 스튜디오다. 디자인을 통해 사회에 필요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그 과정에서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는 방식을 실험한다. 어라우드랩은 다양한 사회 이슈, 기후 위기, 젠더 문제 등을 다루며, 종이와 인쇄 가이드를 포함한 여러 친환경 프로젝트를 진행해왔다. 특히 2020년에 출판한 『종이 한 장 차이』는 디자이너와 제작자들이 환경을 존중하는 방법을 탐구한 가이드북으로 큰 주목을 받았다. 소재에 대한 이야기부터 작업 방식, 가이드를 만들 때 고려 사항까지, 어라우드랩과의 인터뷰를 통해 생태적인 행사를 위한 디자인 가이드를 만드는 것에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어라우드랩을 간단히 소개해주세요.
디자인의 환경적, 사회적 영향에 공감하고 디자인으로써 어떻게 실험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팀입니다. 저희의 작업이 환경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환경 얘기만 하다보면 소외받는 사람들은 없는지 요즘은 그런 고민까지 하고 있어요. 걱정 많은 디자이너 듀오입니다.
디자이너로서 사회적 역할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있었을까요?
전 직장에서 영화 포스터 디자인을 했어요. 아시다시피 영화 포스터는 전국으로 나가다 보니 큰 사이즈로 엄청난 수량을 인쇄하고, 리플릿 같은 경우도 무조건 아트지나 스노우지 종이에 수만 장을 인쇄했어요. 그래도 시나리오를 처음 받아서 읽어보고 디자인하는 과정이 마냥 재미있었는데, 어느 날 영화관을 갔다가 제가 만든 리플릿들이 쓰레기통에서 팝콘과 뒤엉켜 버려져 있는 걸 본 거죠. 결국에는 버려지는 것을 디자인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품 카탈로그를 만드는 작업을 할 때는 안전에 관한 문구를 깨알 같은 글씨로 넣어야 한다는 피드백을 받았어요. 글자를 읽으려면 크기를 좀 더 키워야 할 것 같다고 얘기해봐도 결국은 깨알 같은 글씨로 넣어야 한다는 지시를 받았을 때 ‘내가 누구를 위한 디자인을 하고 있는 거지?’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후로 내가 하는 디자인이 좀 더 많은 사람을 위한 디자인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공부를 더 하기로 했어요. 국민대학교 그린디자인 대학원에 진학하여 다양한 전공의 사람들과 환경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함께 고민하며 작업물을 만들어 볼 수 있었어요. 그곳에서 좀 더 환경에 관심을 가지고 작업을 하게 되었던 것 같아요.
어라우드랩에서 디자인했던 친환경 제작물을 소개해주세요. 이로 인해 얼마큼 환경적 효과가 있었나요?
『제로의 책』은 <제로의 예술>이라는 공공 프로젝트의 도록으로 작업한 책이에요. 활동을 그냥 모아두기만 한 도록보다는 <제로의 예술>로 인해 좀 더 확장된 담론을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는 책을 만들고 싶다는 제안을 주셨고, 저희의 작업을 믿고 지지해주셔서 행복하게 작업을 했습니다. 우선 책 판형부터 고민했는데, 비규격 사이즈면서도 책을 만들 때 파지가 덜 발생하는 숫자를 찾기 위해 계산을 많이 했습니다. 이 책의 또 다른 특징은 표지가 따로 없는 것인데요. <제로의 예술>에서 나온 여러 가지 담론들을 하나의 그래픽으로만 해석하지 않겠다는 의도도 있었고, 책 제작에 필요한 종이의 양을 줄여보고자 했습니다. 본문도 여백을 작게 두어 저시력자를 위해 큰 서체를 사용했음에도 전체 페이지의 분량을 축소했어요. 책에 사용된 종이는 모두 100% 재생지를 활용해 에너지, 물 자원들도 일반 종이 대비 15% 정도 절약을 할 수 있었습니다.
친환경 제작물을 디자인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저희가 작업할 때 제작물의 물성적인 측면에서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순환’이에요. 예를 들면 요즘에 PLA(Poly Lactic Acid) 소재가 친환경이라고 해서 많이 쓰이고, 그 제작물을 친환경이라고 광고하지만 폐기될 땐 재활용 시스템에 안 들어가는 ‘OTHER’로 분류되거든요. 과연 분리 배출되는 일반 플라스틱보다 더 나은 선택일까하는 의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플라스틱 쓰레기 문제를 희석시킨다는 비판도 있고요. 그런 면에서 종이에도 주목했던 것 같아요. 종이는 비교적 재활용이 잘 되는 재료 중 하나거든요. 『종이 제작물의 환경 영향을 줄이기 위한 디자인 체크리스트 연구』는 저의 졸업 논문인데요. 다음은 이 논문을 쓸 때 제가 제일 중요시 여겼던 부분입니다.
- 종이 제작물 생애(Life Cycle)의 전 과정을 고려한다.
- 종이가 종이로 돌아오는 재순환을 목표로 설계한다.
- 환경 영향을 줄이기 위한 디자인 전략과 구체적인 실행 방안을 함께 제시한다.
- 각 항목의 수행 결과를 점수화해 직관적으로 평가의 결과를 확인할 수 있도록 한다.
- 평가의 결과를 시각화하여 부족한 부분을 시각적으로 확인하고, 보완할 수 있도록 한다.
이 중에서도 첫 번째로 중요했던 게 재료의 전 과정과 순환이었어요. 이를 바탕으로 체크리스트를 만들고 사용자가 직접 체크해보고 시각화할 수 있는 툴(tool)을 만들었어요. 이것을 썼던 2020년에 비해 저의 태도가 달라지거나 정보의 변화에 따라 의견이 바뀐 부분도 있어요. 예를 들어 FSC 인증을 받은 종이는 가산점을 받을 수 있게 표시해뒀는데 지금은 FSC 인증에 대해서도 좀 다른 각도에서도 생각을 하고 있어요. 산림 경영 인증이라는 게 결국 조림 사업을 통해 나무를 생산하는 건데, 단일종만 있는 나무 농장이 진짜 숲이라고 할 수 없는 거죠. 환경에 대한 고민과 해결책은 완벽할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정답을 정하지 않고 계속 변할 수 있는 태도도 필요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디자인 과정에서 다양한 이해관계자와 동일한 미션을 공유하고 친환경 제작물을 만들 때 가장 어려운 점이 있다면? 해결한 경험이 있다면 공유해주세요.
디자인을 설득시키는 데 가장 어려운 부분이 하나가 비용, 두 번째가 내구성의 문제예요. 보통 의뢰인은 좋은 결과물을 원하니까 필요 이상 두께의 종이나 후가공을 원하기도 하는데요. 제작물이 사용되는 기간에 따라 적절한 내구성을 지닌 재료를 찾아 제시하고 충분한 얘기를 하면서 설득하는 과정을 거쳐야 되는 것 같아요. 또 하나 어려운 부분은 제작비에 관한 부분이에요. 재생 종이를 사용했으면 좋겠는데 비용이 한정되어 있을 경우, 디자인 작업의 다른 단계에서 해결해보려 해요. 크기를 줄여본다거나, 페이지 수를 줄여보는 거죠. 결국 전체 제작비를 맞추는 과정으로 설득하고 있습니다. 요즘은 사실 친환경적으로 제작하겠다고 했을 때 공감하지 않는 분들은 없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는 부족한 예산 때문일 때가 많아요. 그래서 한 가지만 고집하지 않고 만약에 이 과정에서 조금 포기한 부분이 있다면 다른 과정에서 그 부분을 대체하려고 한다거나 조율해서 진행하는 편입니다. ‘핫핑크돌핀스'와 보드게임을 만들었을 때 코팅이 꼭 필요할까라는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코팅을 하지 않고 테스트를 해봤는데, 실제 게임을 한 10번 진행하니까 인쇄가 벗겨지더라구요. 환경이라는 주제의 게임인 만큼 단체에서 여러 번 사용할 가능성이 높은데 곤란했죠. 코팅을 최소화하기 위해 평소 같이 작업을 하는 인쇄소랑 고민해서 필름이 들어가는 일반 코팅이 아닌 재활용이 가능한 액체 코팅 방식으로 제작했습니다.
일회용 제작물을 줄이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문득 사례가 하나 떠오르는데요. 저희가 참여했던 제로의 예술 공공예술 프로젝트에서 『비거니즘 전시 매뉴얼』을 제작하면서 조립식 모듈가구(디자인·제작 : 이규동)를 만들었는데, 제로의 예술 페스티벌 이후에도 여러 전시에 계속 사용되고 있어요. 종이에 46전지나 국전지 등 산업 규격이 있는 것처럼 나무도 정해진 규격이 있는데, 가구를 제작하는 과정에서도 한 판 전체를 버리는 부분 없이 모듈화해서 재단했어요. 인쇄물은 가구와 다르겠지만, 마찬가지로 사용성을 고려해 적절한 내구성을 지니도록 제작하고, 제작 과정에서 재료의 낭비와 쓰레기를 줄이고, 재활용하기 용이하게 만드는 것. 이렇게 각자의 목표를 가지고 작업하는 것들이 중요하지 않을까 해요. 결국은 ‘태도’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어요.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게 답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계속 다른 쪽에도 관심을 두고 내가 모자랐던 부분은 다시 받아들이고, 고쳐나가고, 이런 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흥미롭게 지켜보거나 참고하고 있는 생태 친화적인 디자인 사례가 있다면 소개 부탁드립니다.
얼마 전 쇼핑백 포럼 발표 준비하면서 해외 사례가 좀 궁금해서 찾아보다 ‘트리투미(Tree to Me)’라는 캠페인을 알게 되었어요. 영국의 SoA(The Society of Authors, 작가노동조합)에서 시작했는데 “내 책이 지구를 희생해서는 안 됩니다”라는 의미로 작가들이 출판사에 던지는 10가지 질문을 만들어 얘기를 하더라구요. 출판사에게 기후 변화 대응에 대한 약속이나 전략, 제작 과정에 있어 탄소 배출량 감축 계획과 재생 용지 사용 여부 등을 요구하면서 마지막 질문에서는 환경을 고려하여 노력한 부분을 독자들의 눈에 띌 수 있도록 어떻게 도와줄 건지를 묻더라고요. 저희도 『제로의 책』에서 사용한 종이나 사용량, 파지율 등 작업하면서 고려했던 내용을 표기했기에 공감이 되었어요. 제작물을 만들 때 환경적인 문제를 디자이너가 해결해야 한다는 사람도 있고, 반대로 왜 디자이너가 환경에 대한 죄책감을 느껴야 되냐고 얘기하는 사람도 만나봤는데요. 그런 측면에서 이 캠페인이 신선하게 다가왔어요. ‘디자이너도 당당하게 요구해도 괜찮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봤어요. 디자이너는 제작 과정 전반을 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죄책감을 느끼지만 한편으로는 그 가운데 있기 때문에 이야기할 수 있는 가능성도 많잖아요.
디자이너들이 현장에서 실질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생태적인 행사를 위한 디자인 가이드를 만들고 있습니다. 기대하는 점이 있다면? 관점과 방향은 어떠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저희가 가이드 만드는 작업에 참여해본 경험으로는 가이드가 ‘양날의 검’이라 느껴져요. 실질적으로 잘 쓰였으면 하는 마음에서 제작 방법부터 구체적으로 명시를 했었는데, 처음 보는 사람들이 쉽게 적용해볼 수 있다는 건 큰 장점이었지만 구체적으로 적어놨기 때문에 가이드를 만들 당시 알지 못했던 부분들이 계속 구멍으로 남아 있어요. 이것만이 답이 아니고 다른 것도 어떻게 보면 더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너무 닫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그런 가능성 부분도 좀 많이 열어주시고, 고정된 정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례를 통해 현장 종사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다양한 옵션을 열어놓는 것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국내 시각 디자인 업계와 제작 과정에서 탄소 중립을 실천할 수 있는 방법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탄소 중립 실천을 위해 필요한 지원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저희 같은 소규모 디자인 업계에서 탄소 중립을 얘기하기에는 범위가 너무 넓다는 생각이 먼저 드는데요. 그래도 얘기해 보자면 서두르기보다는 각자 속도는 다르지만, 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중요할 것 같아요. 탄소 발생량을 수치화할 수 있는 시험 인증을 소규모 인쇄소나 출판사, 창작자가 받는 것은 어려운 부분이 있거든요. 우선 기업이나 협회, 공공기관에서 먼저 데이터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소규모 창작자들은 더 다양한 해법들을 고민하고 실천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사실 저희는 기후위기가 매우 시급한 문제이긴 하지만 “탄소” 한 가지 잣대로만 전체를 바라볼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대형 인쇄소나 신생 인쇄소가 친환경적인 인쇄 방법을 적용하기 더 쉬울 수 있는데 나름의 위치에서 오랫동안 고민하며 작업해 오신 작은 인쇄소들도 있기 때문에 그분들에 대한 존중도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기존의 기계를 폐기하고 새로운 기계로 교체하는 것이 오히려 낭비일 수도 있고, 직접적으로 생계와 연결되기 때문에 갑자기 시스템을 바꾸는 것이 어려운 부분도 있고요. 업계의 현실적 상황과 분위기를 배척하지 않으면서 더 나은 방향으로 함께 나아가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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